독후감을 써야겠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소설은 별로 없는데, 최근에 모 SF 덕후 아저씨서상현 님의 추천으로 SF를 하나 읽었다. 소설 하나를 일주일 내내 (순수 소요 시간만 20시간) 붙잡고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아저씨가 왜 그렇게 극찬을 했는지 알 수준으로는 읽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서 혹시나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영업… 아니, 추천을 할 겸 저널을 덜 망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후감 비스무리한 걸 써 보기로 했다.

Crystal Society는 근미래, 그러니까 2039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SF이다. 저 아저씨의 표현에 따르면, 무려 인간과 외계인과 인공지능이 나오는 과학 소설. 이 표현이 딱히 틀리지 않은게 정말로 저 셋이 함께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 부대끼는 세계관이고, 보통 소설에서 기대하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전체 줄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다분히 옴니버스적인 (그러나 각 줄거리 사이에는 강한 접점이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저 소설은 3부작의 첫 소설이다(2016/2017년에 다음 소설들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더럽게 긴(PDF판이 750쪽!) 소설이 더 길어질 예정이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고 개요만 쓰면, 이 이야기의 화자는 인공지능이다. 소설의 첫 장이 바로 이 인공지능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지를 그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아무리 영어라 해도 사전지식이 없으면 한 번 쓱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이 인공지능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알게 되면 왜 저런 서술이 되었는지 이해를 하게 되고, 그 뒤에 이 인공지능이 어떻게 이런 저런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지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 전까지는 머리를 부여 잡으면서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이것 때문에 소설을 읽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약한” 스포일러에 여기에 대한 얘기를 써 놓았다.)

이 소설은 하드 SF이다. 하드 SF에서 요구하는 과학적 개연성과 더불어, 세계관의 복잡도에서 유래하는 엄청난 양의 뒷배경을 납득이 가는 방법으로 소설 전반에서 이리 저리 묘사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여기에는 화자가 인공지능이라는 요소도 한 몫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배경 하에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 사회(와 기타 등등)를 인식하고 사고하는지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인간과 외계인과 인공지능에 대한 얘기긴 하지만, 사실 SF적 요소를 완전 빼 놓고 평가하면 인간 사회에 대한 작가의 관측을 우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소설에서 인공지능은 꾸준히 인간 사회의 복잡도에 경탄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합리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은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그리고 “목적”[1]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인간 사회에 적응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등장인물/지능의 행동에 뒷통수를 치면서 아놔! 하고 소리를 치고 나면, 이런 일련의 장치들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난 이 소설을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진 않는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이 하나이고(그리고 나는 이걸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단박에 보인다), 전공 세부를 알 필요는 없지만 과학적인 상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게 하나이며, 무엇보다 미래의 (가상의) 인간 사회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한 부담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라서 내 가치관과 전혀 동떨어진 작품이라도 (내 가치관과 다르다는 걸 명시적으로 인식하면서) 잘만 읽는 편인데[2],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부에 이런 요소들이 뭐가 있는지 간략하게 써 놓은 게 있으니 혹시나 불편할 것 같다면 미리 보고 시작하면 좋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한다면 상당히 재밌는 SF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니까 가려 두기로. 아, 설마 링크를 안 눌러 보신 분들을 위해서, 이 소설은 공짜입니다. 링크 타고 가서 바로 읽을 수 있어요.

1 약한 스포일러

스포일러라고 하기조차 어렵지만, 첫 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걸 첫 장만 읽고 이해하는데 꽤 시간이 많이 걸린다.

  1. 인공지능은 하나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소크라테스(Socrates)라는 하나의 인공지능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몇 개의 서로 다른 인공지능들이 각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공동의 자원(특히 소크라테스를 담은 기계 “신체”[Body])을 얼마나 쓸지에 대한 지분을 가지고 경쟁하는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든 과학자들은 “목적”을 다중화하려는 목적으로 이런 설계를 했고 인공지능 자체가 여럿 생길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소설 초중반에 이 사실을 활용한 중요한 사건이 있다.
  2. 공동의 자원은 “힘”(Strength)이라는 화폐로 거래할 수 있다. 각 인공지능의 “목적”을 다른 인공지능이 충당할 수 있거나, 거기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주거나 행동을 하면 그만한 힘을 받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서술을 보면 이 “힘”의 개념 또한 과학자들이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3. 화자에 대응되는 인공지능은 “얼굴”(Face)이며 이 인공지능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얼굴”이라는 이름은 엄밀히는 인공지능들이 서로와 소통하는데 쓰는 공유 메모리에서 쓰는 내부 언어를 영어로 얼추 번역한 이름인데, 중간 중간 다른 이름, 이를테면 “대표”(Ambassador), “명사”(Socalite), “자아”(Ego)라는 이름이 잊을 만하면 튀어나온다. 실제로는 영어로 그렇게 표현된다 뿐이지 저 이름들을 표현하는 내부 기호는 하나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설계는 최근에 사망한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의 사회로서의 마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Crystal Society인 것이다. 작중에서도 여러 인공지능들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회[Society]라는 표현을 쓴다.) 다만 마빈 민스키는 사회의 개별 구성원(agent) 자체는 마음이 없고, 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 마음으로 나타난다고 썼는데, 이 소설에서는 개별 구성원이 마음이 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복잡한 존재로 표현되어 있는 게 큰 차이이다. 여하튼 이 소설을 소개해 준 아저씨에 따르면 이 개념을 이 정도로 전면에 내세운 SF가 거의 없었다는 듯.

여하튼, 화자가 인공지능인 덕분에 한 가지 중요한 서술 트릭이 작중 전반에서 등장하는데, 특히 세계관에 대한 내용, 예를 들면 외계인(The Nameless, 즉 “이름 없는 자”라고 불림)에 대한 내용은 인공지능이 거기에 대해서 초반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델링한 것만 빼면 인간이랑 비교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사고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자기가 모은 데이터들을 모두 저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이 거의 안 되어 있다. 그러다가 “지구의 신경계”, 즉 인터넷을 만나고 그걸로 온갖 짓을 하고 다니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배경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무서운 속도로 세계관이 밀려 온다. 그리고 이 세계관들은 중후반의 전개에 큰 영향을 준다.

2039년의 지구에 대한 서술은 대략적으로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외계인이 등장했다는 예측 불가능한 사실을 제외하면,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는 약인공지능[3]에 반대하는 테러집단 “붉은 수리”단(Las Águilas Rojas, 라스 아길라스 로하스)이나, 아프리카 연합이 아프리카 통일 전쟁을 통해 통일 아프리카 국가(UAN)를 이뤘는데 이집트가 UAN에 참여하지 않은 댓가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거나, 미국에서 붉은 수리단을 비롯한 여러 압박에 못이겨 기본 소득 제도를 채택한다거나, 화성 여행이 (비싸지만) 활성화되었다거나 하는 내용들은 있음직할 뿐만 아니라 꽤 많은 것들이 당장 20년 안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 일면 섬뜩하게 느껴진다.

2 진짜 스포일러

진짜 스포일러이니만큼 내용을 빠르게 요약해 본다. 읽을 생각이 있다면 절대로! 미리 읽지 마시길.

아이고, 정리하기도 참 힘들다. (인간 이름은 줄거리에서 거진 다 빼먹었는데, 내가 이름들을 잘 발음할 자신이 없어서 이렇다. 갑부의 꼬마애 같이 고정된 이름이 없는 경우도 있고…) 이 쯤 되면 그냥 인공지능의 모험이라고 써도 될 판일 정도로 각 줄거리간의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는 이 사이 사이에 관계가 잘 지어져 있어서, 예를 들어 최종적으로 과학자 두 명이 무력을 쓰다 죽어버리는 데에는 1부 초반부터 계속 은근슬쩍 나오는 미국과 유럽/러시아 측 과학자들 사이의 갈등이 뒤에 있고, 통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내용은 이 국가 출신의 붉은 수리단 단원의 과거와, 후의 프로파간다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어디까지나 위 줄거리는 (다 읽고 무슨 내용이 어디 있었는지 대강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에피소드 가이드로 쓰는 것이 낫겠다.

앞에서 이 소설이 SF의 요소를 많이 갖추긴 했지만 사실 인간 사회에 대한 관찰을 더 많이 하고 있다고 서술했는데, 실은 크리스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말하듯, 크리스탈을 이루는 인공지능들은 인간 두뇌를 모델링하여 만들어진 지각 체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겪는 비합리적인 논리에 여전히 빠질 수 있다. 이들은 대신 인간에 비해 빠른 사고 과정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과의 대화를 가지고 이 문제를 극복한다. 각 인공지능들이 내리는 결정은 일면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문제가 여럿 있는데, 이를 빠른 속도로 다른 인공지능이 기각하여 쓸모 있는 논리만 추려내는 것이 인간과의 차이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다수의 합리적인 사람이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도 보인다.

글이 꽤 길어서 눈치채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 사실을 화자가 대놓고 직접 얘기하기 전까지는), 각 인공지능의 성격은 본래는 “목적”에 따라 정의되었고 서로의 이름도 그러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목적하는 바가 변질(?)되어 성격이 재형성되는 점이 재밌다. “몽상”(Dream)은 본래부터 창의성을 담당하긴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가가 되더니 나중에는 온갖 비유와 인용으로 다른 인공지능들을 놀려 먹는 수준에 이르고 원래 “몽상”의 역할은 지식을 담당하는 “위키”(Wiki)가 덤으로 하고 있다. “성장”(Growth)은 자원과 기술을 관리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런 거 상관 없고 화자인 “얼굴”과 비슷하게 전략가가 된다(둘의 차이는 둘의 본질적인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경치”(Vista)는 환경을 관측하는 게 목적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 왔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관측이라는 낱말만으로는 서술되지 않는 (그래서 화자가 대놓고 캐릭터에 어긋난다고 언급할 정도의)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 원래는 “희생”의 대체제로 투입된 “마음”조차 화자인 “얼굴”이 자기랑 비슷해지고 있다고 서술할 정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하지 않는 인공지능은 “안전”(Safety)과 “변호”(Advocate) 정도?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왜인지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것은 “목적”이 서서히 무력화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후반에서 서서히 가능성이 제기된 소프트웨어 버그일 가능성도 있는데, 소설 내용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후속작이 나와 봐야 할 듯.

줄거리의 개연성에 대해서 크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위의 가이드 없이 어느 부분이 무슨 줄거리인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은 귀찮은 점이지 소설의 가치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줄거리가 뒤로 가면서 너무 빨리 끝난다는 느낌이 드는 게 아쉽다. 작가가 원래 초고를 중간 정도까지 쓰다가 양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 3부작으로 나누고 1부에 해당되는 이 소설을 먼저 탈고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마지막 장의 갈등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느껴졌는데, 이건 외계 우주선을 상상하고 그걸 설명하는 게 많이 거시기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혹시나 여는말과 “쉬는말”[4]의, 다른 모든 내용과 전혀 안 맞는 신화 비스무리한 내용을 본다면, 그게 이 3부작이 최종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한 힌트일 것이다. 이 힌트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여는말에서 끝맺듯, “이건 [크리스탈 또는 ‘얼굴’]의 신격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소설에서 이탤릭으로 The Purpose라고 나오는 것. 이게 뭔지는 스포일러는 아니긴 한데 미리 밝히면 재미가 없다.

2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 소설에는 (하드 SF에선 드문 일도 아니지만) 합리주의와 초인류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합리주의자도 초인류주의자(transhumanist)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초인류주의의 경우 강한 비관론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그걸 믿고 자시고를 떠나서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뿐.

3

하나의 작업에 한정된 인공지능.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공지능 하면 생각하는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는 일반지능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져서 “강인공지능” 또는 “인공일반지능”(AGI)라고 따로 구분한다. 강인공지능이 근미래에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지만, 약인공지능은 의견을 따지기 전에 이미 많이 실용화되어 있으며 이 소설에서 서술하는 약인공지능의 위협은 이미 현실에 근접해 있다. 참고로 이 세계관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첫번째 강인공지능이라는 설정.

4

Interlogue. 3부작에서 첫번째 소설과 두번째 소설 사이에 들어가는 내용이라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정황상 두번째 소설에는 여는말이 없을 듯.